Opinions I September 11, 2023 I Written by 권오윤 이사
NIH 신드롬은 말 그대로 ‘여기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 (Not Invented Here)라는 배타성을 드러내는 의미로 타분 야 출신이 개발한 결과나 성과는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조직문화를 일컫는다.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부 조직의 경험과 역량으로만 해결하려 하고 새로운 시각이나 다른 해법은 무시하거나 수용하지 않는 경향은 어떤 분야에서나 흔히 나타난다. ‘우리 업종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그런 방식은 우리 업계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간혹, 해당 업계의 프로젝트 수행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고객들이 있다. ‘우리 업계 일을 맡아본 적이 있나요?’, ‘유사업종 포트폴리오가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물론 각 업계의 특수한 상황과 서로 다른 체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업무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디자인을 비롯한 모든 프로젝트에는 방대한 리서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과제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식'이 있다. 명확한 목적 규정과 해결을 위한 새롭고 다양한 방식은 오히려 성공적이고 혁신적인 해결책을 낳을 수 있다. 흔치는 않지만 우리는 그런 시도들을 목격하고 있다. 올해 2월, 루이뷔통은 세계적인 팝 음악 프로듀서 ‘패럴 윌리엄스’를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해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패션디자이너 패럴 윌리엄스, 무대 총감독 장예모, 영화감독 탐 포드
패럴 윌리엄스는 ‘슈퍼 프로듀서’라는 말 자체를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가 음악계에 데뷔한 이후, 팝 음악은 프로듀서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992년 'Rump Shaker'라는 메가 히트곡의 프로듀서로 데뷔한 그는 이후 Jay-Z, 넬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베이비페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 마룬5, 스눕독, 샤키라 등 셀 수 없는 히트곡을 프로듀싱하며 이른바 슈퍼 프로듀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아티스트들은 히트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프로듀싱을 맡겨야 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가수 겸 래퍼로 ‘Happy’, ‘Money Maker’와 같은 메가 히트곡을 생산했다. 음악적 재능 이외에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스타일링이다. 힙합의 자유분방함과 어우러진 그만의 시크한 룩은 다양한 패션계의 거장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패럴 윌리엄스 : 슈퍼 프로듀서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왼쪽부터 ①프로듀서로 두각을 내던 시절, ②코첼라 2014에서 공연하는 패럴, ③패션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던 그의 스타일링]
2003년 당시 루이뷔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크 제이콥스의 제안으로 선글라스 라인 콜라보레이션에 참여함으로 패션계에 첫발을 들였다. 그 후 티파니, 샤넬, 나이키, 아디다스 등 여러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2023년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버질 아블로가 떠난 루이뷔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후임으로 그가 임명된 것이다. 발표 직후 의견이 분분했다. 그가 패션계의 인사이더가 아니라는 우려와 그렇다고 완전히 아웃사이더는 아니라는 의견이 공존했다. 찬반양론, 기대와 우려가 분분한 가운데 올해 6월 그의 첫 번째 컬렉션이 파리 패션위크에서 소개되었다. 기대와 우려처럼 찬사와 혹평이 공존한다. 하지만, 공통적인 의견은 ‘매우 그답다’ ( Very Pharrell)이라는 것이다. 독보적인 그만의 미학이라는 점에서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그리고 다음 시즌 그의 컬렉션을 기대하게 한다. 명확한 것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자유분방함’이라는 주제는 음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패션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왼쪽부터 ①티파니와의 콜라보레이션 선글래스, ②LV에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첫번째 컬렉션]
장예모 감독은 세계 3대 국제 영화제 (깐느, 베니스, 베를린) 모두 최고상을 거머쥔 역사상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다. 수상 경력으로만 보자면 마틴 스콜시지, 프랜시스 코폴라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시기에 자유로운 사상과 새로운 기법으로 구세대 중국영화와 구분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네러티브보다 빛과 색채, 몽타주 등의 시각 효과를 부각시키며 전 세계적인 미쟝센의 대가로 등극했다. 간간히 오페라 ‘투란도트’와 같은 무대를 연출하기는 했지만 중국 정부가 그에게 2008년 북경 올림픽 개/폐회식 총연출을 의뢰했을 때는 전 세계가 놀랐다. 올림픽 역사상 최대의 압도적인 물량과 인력을 총동원한 화려하고 거대한, 한마디로 대륙의 기상이 전해지는 최고의 개/폐막식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여전히 런던올림픽과 함께 최고의 개/폐막식으로 남아있다. 오히려, 그 다음 개최지였던 런던에서 북경올림픽에 비해서는 자신들이 초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하며, 장예모 감독은 영화가 아닌 무대 연출로 그 해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인에 선정되었다.
탐 포드는 한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대명사였다. 패션하면 모두 그를 처음으로 떠올렸으며 요즘 말로 하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구찌'와 ‘입생로랑’을 동시에 이끌었고, 특히 라이선스 브랜드로 전락했었던 입생로랑을 시대의 가장 각광받는 브랜드로 단숨에 끌어 올렸다. 그랬던 그가 2005년 구찌와 입생로랑을 동시에 떠났고, 곧바로 자신의 영화 프로덕션 회사를 설립했다. 물론 그의 패션레이블 탐 포드로 패션계 경력은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긴 하다. 2009년 그의 첫 감독 데뷔작 ‘싱글맨’이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5년, 두 번째 작품인 ‘녹터널 애니멀’은 평론가 사이에서 호평받으며 베니스 영화제 ‘Grand July Prize’를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패션에서 일군 최고의 위치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화계에서도 그의 발자취는 짙게 남기고 있다. 더욱이 그의 영화 경력은 아직 끝이 아니다.
영화감독의 올림픽 개/폐회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영화
[왼쪽부터 ①독보적 미쟝센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붉은 수수밭’, ②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화려하다고 평가되는 북경올림픽 개/폐회식
③평단의 호평을 받은 ‘녹터널 애니멀’의 주연들과 함께 한 영화감독 탐 포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이기 이전에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고 한다. 성주에게 보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력서에는 ‘축성술’, ‘무기 제조술’ 등이 기술되어 있고, 마지막 열한번째 칸에 ‘그림도 조금 그립니다’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한 분야에서의 직능과 전문성이 강조되던 시기가 있었고 여전히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순히 응용력의 차원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면 맹목적인 NIH 신드롬으로 새로운 방식을 배척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을까? 물론, 어떤 분야든 깊고 방대한 리서치와 적응은 필수이다.